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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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5


머나먼 북쪽에서 아실이 던진 질문을 힌치오가 들었다면 대답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라티본 부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운하 를 파는 레콘들이다.

얼어붙은 듯 미동도 하지 않는 힌치오의 곁에는 팔리탐 지소어 가 말에 탄 채 서 있었다. 팔리탐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규정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팔리탐은 고민 속에서 말고삐를 손목에 감았다 풀었다 했다.

그들이 서 있는 높은 산등성이에서는 저 먼 곳의 평야에 펼쳐 져 있는 불야성이 뚜렷하게 보였다. 무수히 많은 횃불과 화톳불 로 밝혀져 있는 그곳에서는 여느 공사장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규 모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폭 5미터, 그리고 지형에 따라 바뀌긴 하지만 평균적으로 깊이가 3미터인 운하가 마치 풍경화를 그리는 듯한 빠른 속도로 평야 위에 드러나고 있었다. 제국군 측 에 질의서를 보낸 것은 아니지만 팔리탐은 그 가공할 속도가 어 떻게 가능한지 알 것 같았다. 엉겅퀴 여단의 레콘들은 대대 단위 로 교대 작업을 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할당 구간을 빨리 끝낼수 록 운하 공사 현장에서 빨리 떠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들도 운 하 공사가 내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공사 속도는 매우 빨랐다. 팔리탐이 말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유리한 전장 을 가지고 오겠다는 뜻이군. 사라티본에서 그런 일을 겪었지만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대장군에게 낯을 세울 수 있을 것 같 소.”

힌치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국군에 대장군 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군.”

“그렇소. 대장군이 없어도 제국군은 여전히 제국군이오.” 

그럴 기세처럼 보이긴 해도 제국군이 파리조까지 운하를 팔 수 는 없을 것이다. 팔리탐은 측량 지식이 없었고 파리조의 고도에 대해 알아본 적도 없지만 파리조가 고지대임은 분명하다고 생각 했다. 만약 저지대라면 밀려 들어온 물이 오래전에 파리조의 바 위들을 침식시켰을 테니까. 하지만 파리조 가까운 지점까지 운하 를 팔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그리고 심리 적인 영향력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파리조까지 운하를 파서라 도 진격하겠다는 제국군의 태도는 아라짓 제국의 강대한 힘을 유 감없이 드러내는 대역사였다. 암살공의 소환에 응한 소영주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사라티본군의 맹전에 고무되었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의지를 잃었다. 이미 불안한 표정과 불쾌한 잡음들이 감지되고 있다.

그들을 다시 안심시키려면 운하 공사를 중단시켜야 한다. 레콘 들의 공사를 방해하려면 당연히 레콘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하지만 힌치오는 사라티본 부대가 투입되는 것을 거부했다. 이유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 팔리탐 자신이라도 공사장에 적의 레콘이 나타난다면 수문을 열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암살공은 힌치오를 몰아붙였다. 운하를 파는 것도 레콘 인데 그것을 방해하는 일을 왜 못하냐는 락토의 질책은 힌치오를 몹시 동요시켰다. 힌치오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락토를 노려보 았다. 결국 팔리탐이 타개책을 내야 했다. 락토는 팔리탐의 요청 을 받아들여 그와 힌치오가 공사 현장을 직접 보고 오는 것에 동 의했다.

공사 규모가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안전한 거리에서도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밤이었고 휴월의 희미한 빛밖에 없었기 때문 에 그들이 포착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팔리탐은 만약 자신들 이 포착된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운하 공사의 경비 태세를 알면 공격 가능성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팔리탐은 힌치오 에게 어떤 이상이 생길 경우 사라티본 부대의 통제가 불가능해진 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팔리탐은 불안하게 툴툴거리는 말의 목을 쓸어 주었다. 그가 보기에 이 전쟁은 정말 불가사의한 것이 되고 있었다. 한쪽에는 물벼락을 맞고도 안전하게 귀환한 육천 명의 레콘들이 있다. 그 런데 그 레콘들의 맞은편에는 다른 레콘들이 운하를 파고 있었 다. 레콘이 물을 싫어한다는 것은 공리다. 해석의 기초가 되는 공리가 무시되고 있기 때문에 해석은 불가능했고 따라서 전망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팔리탐은 전쟁의 흐름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불안감 이 상의 것을 느꼈다.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연계의 질서 가 바뀌는 일이었다. 레콘은 개인주의자이고 세상의 흐름에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들도 세상의 일부이며 막대한 힘을 가지 고 있다. 비록 조그마한 것이라도 그들 모두가 변화를 일으킨다 면 세상 자체도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받을 것이다. 팔리 탐은 황제가 왜 분리주의 운동을 허용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 다. 그것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상을 무턱대고 만들어 내는 일 이다. 물론 새로운 세상의 구축은 원시제도 행한 일이었고 그 결 과는 위대한 제국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원시제 같 은 천재는 아니다. 아라짓 제국의 탄생은 일어나기 힘든 행운이 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전쟁은 위험하군.’

팔리탐은 그렇게 생각했다. 위험에 처한 것은 암살공이나 황제 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것인지도 모른다. 락토가 먼저 시작했고 이제는 제국군도 그렇게 하고 있듯이, 그들은 승리를 위해 레콘 을 함부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진 쪽은 물론이거니와 이 긴 쪽도 승리로 상쇄시킬 수 없는 끔찍한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 전쟁은 빨리 끝나야 한다.

힌치오가 뭐라고 말했다.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팔리탐은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소?”

“가까이 가 보자.”

팔리탐은 놀란 얼굴로 힌치오를 바라보았다. 힌치오는 이쑤시개를 어깨에 걸친 채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팔리탐은 말을 재 빨리 움직이며 말했다.

“어디까지 가려는 거요? 여기서도 잘 보이는데.”

힌치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단단한 걸음으로 운하 공사장 쪽을 향해 걸어갔다. 팔리탐은 미심쩍은 눈으로 휴월을 바라보았 다. 그리고 힌치오의 크고 하얀 몸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잘 보 일지 생각해 보았다. 지금이 충분히 어두울까?

팔리탐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두 번째 생각했을 때도 힌치오 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 가장 가까운 공사장과의 거리는 몇 백 미터에 불과했고 레콘에게 그것은 먼 거리가 아니다. 팔리탐은 당황하여 힌치오를 불렀다.

“힌치오!”

힌치오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어깨에 걸쳐 두었던 이쑤시개를 내려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팔리탐은 어쩐지 그것이 돌격 자세처럼 보였다. 힌치오가 말했다.

“시험해 봐야겠어.”

“시험? 무엇을?”

“두고 봐.”

팔리탐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공사장과 힌치오를 번갈아 쳐 다보았다. 그가 다시 설명을 요구하려 했을 때 힌치오가 이쑤시 개를 높이 들어 올렸다.

힌치오는 하늘을 찌를 듯이 꼿꼿하게 세운 이쑤시개를 잠시 그 대로 두었다가 앞쪽의 바위를 내리쳤다. 귀가 멀 것 같은 충격음 에 팔리탐은 기겁했다. 흥분하여 난동을 부리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팔리탐은 고삐에 결사적으로 매달려야 했다. 그때 힌치오가 커다란 계명성으로 외쳤다.

“수문이 터졌다-!”

팔리탐은 기어코 말에서 떨어졌다. 고삐를 놓지 않은 것은 오 랜 세월의 훈련 탓이다. 고삐를 놓칠 경우 크게 다치거나 말에게 밟힐 수도 있다. 힌치오가 손을 옆으로 뻗어 말의 고삐를 낚아챈 후에야 팔리탐은 몸을 굴려 말 주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팔리 탐은 몸의 아픔을 돌볼 생각도 못한 채 운하 공사장에 펼쳐진 난 동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땅이 길게 갈라지며 불꽃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기다란 운 하에서 작업하던 레콘들이 한꺼번에 뛰어올랐다. 장관이라면 장 관이고 비극이라면 비극일 텐데, 어쨌든 엄청난 구경거리라는 점 은 분명했다. 비명과 발 구르는 소리는 태풍의 한가운데 들어선 것 같다. 레콘들답게 장관은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레콘들은 서 로를 걷어차며 더 높이 뛰어오르려는 놀라운 시도를 했다. 자갈 들을 넣은 커다란 통을 위아래로 흔드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무수히 많은 깃털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마치 폭설이 쏟아지는 듯 한 형국이 되었다.

최초의 도약 이후 용케 다른 레콘들을 걷어차며 아직까지도 하 늘에 머물러 있는 재주 좋은 레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레콘 들은 하나 둘 아래로 떨어졌다. 대부분은 다시 뛰어올랐지만 어 떤 레콘들은 자신이 운하에서 충분히 떨어졌음을 깨닫고는 운하 의 상류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기묘하다는 것을 느꼈다. 수문이 정말 터졌다면 지금쯤 물이 쏟아져 흐르고 있어야 했다. 그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운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다른 레콘들의 주의를 끌었다. 운하에서 멀리 떨어진 레콘들부터 제자리에 멈춰 서서 상류 쪽을 바라보았다. 몇 분 후에는 모든 레콘들이 멈춰 섰다.

급류가 흘러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땅이 울리지도 않았 다. 레콘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운하나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 았다. 그때 어떤 레콘이 분에 못 이기는 목소리로 외쳤다. 

“속았다! 근처에 발케네 레콘이 있어-!”

제국군의 레콘들은 멈칫하다가 조금 후에야 그 계명성의 의미 를 깨달았다. 그들은 두 번째 소동을 일으켰다. 고함을 지른 괘 씸한 레콘을 찾아내기 위한 소동이었다.

그들에겐 불행하게도 근처에 발케네 레콘이 있다는 지적은 정 확한 것이 아니었다. 레콘들이 첫 번째 소동을 부리는 동안 힌치 오는 팔리탐을 허리에 끼고 말고삐를 끌며 원래 위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군 레콘들의 두 번째 소동이 일어날 때는 이 미 충분히 먼 거리에서 팔리탐을 내려놓고 공사장 쪽을 만족스럽 게 바라보고 있었다. 팔리탐은 바닥에 주저앉아서 급한 움직임 때문에 비틀어진 가면을 바로잡아 시야를 확보했다. 힌치오를 볼 수 있게 되자 팔리탐은 놀란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힌치오!”

“생각대로군. 이런 식으로 방해할 수 있겠어.”

어쩌면 폭발적으로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겉모습만 놓고 본 다면 꽤 유쾌한 장면이니까. 하지만 팔리탐은 그러지 못했다. 자 신만만한 표정으로 수염볏을 쓰다듬는 힌치오를 보며 팔리탐은 고통과 비슷한 거부감을 느꼈다. 물에 빠졌다가 돌아온 레콘도 보았고 운하를 파는 레콘도 보았다. 하지만 팔리탐은 물을 무기로 이용하는 레콘을 보며 감당키 어려운 충격을 느꼈다. 그것이 비록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격적이다.

하지만 락토는 그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시간 뒤 라이옥 성에서 힌치오와 팔리탐의 보고를 받은 락토는 크게 웃었다.

밤새 정찰을 하고 돌아온 두 사람을 위해 락토는 회의실로 음 식을 가져오게 했다. 두 사람이 음식을 먹는 동안 락토는 회의실 한쪽에 있는 발케네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팔리탐 과 힌치오가 식사를 끝낸 후에 락토는 빠르게 말했다.

“좋아. 그런 식으로 전진 속도를 늦추며 기다리도록 하자.”

“무엇을 기다립니까?”

“조만간 펜스터에서 레드마 브릭이 올 것이다.”

“정체 모를 제국군에게 봉쇄되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얼마 전에 그 정체를 알았다. 그들은 아기살로 공격당 했다고 하더군.”

“헨로 중대였군요. 하지만 그 중대는 이곳에 있는데?”

“맞아. 헨로 중대는 오래전에 펜스터를 떠났고 레드마를 막고 있었던 것은 소규모의 분견대였다. 그 분견대는 정체가 노출되자 곧 도망쳤고 레드마는 군사를 정비하여 이곳으로 출발했다. 노바 일과 군스,미차도의 병력도 올 것이다. 그들이 도착하는 대로 공격하지.”

“공격입니까?”

“제국군을 더 전진시킬 수는 없지. 그러면 후방에서 항구적인 전략 거점을 구축할 수 있을 테니까. 운하를 가져오겠다는 배짱은 마음에 들지만 그러면 제국군도 엉겅퀴 여단을 전장에 투입시 킬 수 없다. 인간끼리 싸우게 될 텐데, 인간의 숫자만 놓고 보면 우리는 적의 세 배다. 사라티본 부대가 엉겅퀴 여단을 붙잡아 두고 있는 동안 본대를 처리하면 돼.”

암살공의 계획은 단순했지만 단순한 만큼 허점도 별로 없었다. 압도적 병력이 있는데 전술 숙지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아군 에 혼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복잡한 전술을 굳이 구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암살공의 결정에 따라 발케네군의 행동이 정해졌다. 사라티본 부대의 목청 좋은 병사들이 번갈아 운하 공사장 주변으로 찾아가 엉겅퀴 여단병들을 혼란시키고 도망치는 일이 시작되었다. 끔찍 하게 화를 내는 쥘칸을 달래기 위해 오니는 수문이 혹 열릴 경우 종소리로 신호한다는 안을 내었다. 그것은 하늘누리에서 급격한 기동이 있을 때 사용되는 방법이었다.

얼마 후 힌치오는 운하 공사장으로 갔던 병사들로부터 제국군 이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들었다. 힌치오는 지 나치게 거짓말을 많이해서 제국군이 이제는 믿지 않게 된 것인가 생각했지만 팔리탐은 제국군이 신호를 바꿨을 거라고 추측했다. 운하 상류의 수문에 대한 정찰 활동이 강화되었다. 얼마 후 수문 근처에 종이 있음이 보고되었다. 힌치오는 큼직한 종을 준비하여 직접 운하 공사장으로 갔다. 밤중에 들려온 귀가 멍멍한 종소리 는 작업 중이던 레콘들을 발작하게 만들었다.

시허릭은 고민했다. 상대방이 라이옥 성에 틀어박힌 채 그저 제국군의 전진 속도만 늦추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기다리 고 있다는 의미다. 아마도 추가 병력의 합류일 것이다. 그런 합류를 저지하려면 광정면(面) 분산 배치를 해야 할 터였지만 이곳은 발케네 땅이다. 적지에서 든든한 근거지도 부족한 상태에 서광정면 분산 배치를 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운하 근처를 떠 날 경우 적의 레콘 부대에 기습당할 위험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대회전으로 가야 한다. 결국 시허릭은 운하의 건설 속도를 높여 서 발케네 공이 견디지 못하고 성을 빠져나와 싸움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결정했다. 고지대에 있는 라이옥 성에는 해자가 없으므로 레콘의 공격에는 취약하다. 따라서 발케 네 공이 라이옥 성에 의지하여 농성을 시도할 가능성은 별로 없 었다. 결론을 내린 시허릭은 쥘칸에게 섬세하게 짜증을 부렸다. 쥘칸은 시허릭의 짜증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오니와 함께 머 리를 짜내어 봉화를 만들기로 했다. 수문 방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목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신호에도 동요하지 말 라는 명령이 엉겅퀴 여단병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락토 빌파는 더 이상 운하 공사를 방해할 필 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국군이 파내는 운하가 라이옥 성남동 쪽 4킬로미터까지 도달했을 때 락토 빌파는 모든 방해를 중단한 채 기다리기로 했다.

이틀 뒤, 기다리고 있던 발케네군의 눈앞에 펜스터 자작 레드 마 브릭의 깃발이 나타났다. 하지만 레드마 브릭이나 그의 병력 은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브릭의 깃발을 들고 나타나 제국군에 합류하는 고추냉이 여단과 왜솜다리 여단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락토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을 묻는군. 짐이 그들을 불렀다. 두 여 단이 황제의 명령 외에 누구의 명령을 듣겠는가.〉

치천제의 니름을 들으며 데라시는 이마를 짚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 있지 않았다. 벽난로가 활활 불타오르는 방 안에는 사 도락신 치올과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지알데 락바이는 데라시로 하여금 벽난로의 불을 꺼도 되지 않을 까 의심하게 할 만큼 열기를 뿜어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데라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은 폐하의 명령을 받고 온 것입니다.”

지알데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황제가 접견을 거부하자 데라시 의 방으로 찾아와 황제에게 니르라고 강요했던 이 삼고의 일원은 그런 대답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귀족원에서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백작. 폐하께서는 어 떻게 그들을 진정시킬 작정이신지 여쭤봐 주게.”

데라시는 자신이 뱀단지나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분노하고 있 는 천경유수에게 불평을 늘어놓아 봤자 통할 리가 없기 때문에 순순히 황제에게 닐렀다. 조금 후 데라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벽난로 옆의 의자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천경유수님. 폐하께서는 천경유수의 뱀단지 노릇 은 그만두라고 하셨습니다.”

지알데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데라시를 노려보았다. 사도가 말했다.

“지알데, 이미 온 것을 어쩌겠나. 또 발케네 공이 일만 명의 레콘이라는 흉악한 준비를 해 두었으니 이쪽에서도 그에 어울리 는 대비를 갖추는 것이 마땅하겠지. 귀족원은 레콘 여단 세 개가 동원되었다는 것에 분노하기에 앞서 일만이라는 맹랑한 숫자의 레콘 병사를 기른 발케네 공을 지탄해야 해.”

지알데는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락신을 바라보았다.

“락신! 일만이라는 소리는 집어치우게. 그것은 육천이야. 그리 고 실제 전투력으로 따지면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거야. 그것 은 그냥 많은 숫자의 레콘일 뿐이야. 그냥 폐하의 신민이 많이 모여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레콘 여단은 전투를 위해 훈련받은 병사들이야. 어떻게 숫자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 둘을 비슷하게 보는 망발을 할 수 있는 건가?”

“레콘은 레콘이야. 그들은 혼자 있어도 군대라고 하지. 자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자네도 암살공이데 리고 있는 병력이 인간 육천 명이 모여 있는 것과 같은 거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도륙할 이유는 되지 않아! 게다가 이것 은 선례가 된단 말이야. 아라짓 제국의 황제는 외적에 대비하여 제국군이라는 고금에 없었던 막강한 병력을 거느릴 수 있는 거 야. 두 번의 대확장 전쟁과 천일 전쟁을 통해 북부에 엄청난 위 험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 나가들이 저 남쪽에 있기 때문이지. 그 엄청난 무기를 제국 내부에 쓸 권리는 없어!”

락신은 눈을 부릅떴다.

“말 조심하게, 지알데. 자네가 폐하의 권리를 정할 수는 없어.”

“나는 도덕을 말하는 거야, 락신! 폐하께서 법 위에 있다 하셔 도 도덕 위에 있으실 수는 없어. 대호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기 배를 찢던가? 용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던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돼!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도덕의 기본 중의 기본이야.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가 혹 있다면 아무 규칙도 없는 두억시니뿐이야. 폐하께서 제국을 두억시니로 만드실 수는 없어!”

데라시는 두 고귀한 대신이 나가는 소리에 둔하기 때문에 대화 에서 제외해도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이곳은 그의 방이고 다른 사람의 방에서 주인을 제외한 채 언쟁을 벌이는 것 은 분명히 무례다. 천경유수의 도무지 자제할 줄 모르는 말에 곤혹스러워 하던 락신도 그것을 깨달은 듯 데라시를 논의에 초청 했다.

“비스그라쥬 백,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물어볼 필요도 없는 말이다. 데라시는 사도가 원하는 것이 천 경유수를 설득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 가의 목소리에 정말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마법이 들어 있기를 바라며.

“저는 지금 저들을 돌려보낸다면 폐하께서 웃음거리가 되실 것 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마법은 없는 모양이다. 지알데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데라시를 노려보았다.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 범죄를 저지르는 얼간이들에 대 해 나는 아주 많이 들었네, 백작.”

효과가 잘 알려져 있는 몸짓의 마법을 기대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데라시는 겸손한 몸짓을 해 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예, 그저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잘못된 일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 지만 귀족원의 귀족들 모두가 그렇게 선의로 해석해 줄지 의문스 럽습니다. 특히 퍼스 후작 같은 이가 어떻게 나올지 정말 걱정됩니다.”

퍼스 후작의 이름은 지알데를 입 다물게 했다. 지알데는 퍼스 후작을 입과 욕심만 크고 나머지는 모두 작은 위인 정도로 취급 하지만 큰 입이 물어뜯으면 때론 큰 상처가 남는 법이다. 데라시 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제국군의 사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제국군은 외적에 대비하여 제국을 지킬 책임이 있는 황제의 군대 입니다. 그들의 주인이 귀족들에게 굴하여 그들을 위험에 빠트린 다면 크게 실망할 겁니다.”

“위험이라고?”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부하 장병에게 땅을 뒤덮은 채 달려 오는 레콘들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전투의 주인인 부위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많은 부위들 이 죽었고, 곁에 레콘 여단이 없는 상태에서는 상장군이 두 번째 돌격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후퇴하면 돼.”

간단한 대답이었다. 단지 그 단순함의 아름다움 때문은 아니 나, 데라시도 그 의견에 동조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부질없는 희망을 담아 데라시는 잠시 닐러 보았다. 

<천경유수는 후퇴하면 된다고 하는군요, 폐하.〉

대답이 없었다. 데라시는 소맷자락을 가다듬는 척하며 잠시 생 각을 정리했다.

“후퇴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발케네 공이 진지하게 사과하 고 부냐 헨로를 돌려보낼 때, 그리고 제국에 큰 위험이 될 수도 있는 레콘 부대를 자진 해산할 것을 약속했을 때라면 물러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후퇴는 불가능합니다. 현재의 도덕을 지키기 위해 미래의 분란을 조장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발케네 공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지알데는 날카로운 눈으로 데라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네도 이 전쟁의 이유를 알고 있나?”

데라시는 비늘이 약간 부딪치려는 것을 느꼈다. 지알데는 꿰뚫 을 듯한 눈으로 비스그라쥬 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자신도 믿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락신 치올 사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지알데를 바라보았다. 지 알데는 거침없이 말했다.

“이것은 황위 계승 전쟁이야. 백작도 그것을 아는 것이지? 그리고 락신, 자네도 짐작하고 있지?”

데라시와 락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알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두르는 이야기는 관두지. 이 이야기가 밖으로 흘러나가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 사이에도 벽을 세우는 것은 귀찮고 혼란스러운 일이야. 자네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싫어. 그 러니 이 고집 센 늙은이가 툭 털어놓고 말하는 것을 용서하게. 폐하께서는 엘시 에더리를 차기 황제로 내정하셨어. 그리고 차기 황제에게 방해자가 될 인물은 모두 제거하실 작정이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황제가 되실 작정이지. 선황제를 증오할 수록 차기 황제에 대한 애정이 높아질 테니까.”

데라시는 불편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경유수를 익히 아는 락신은 그저 한숨을 내쉬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엘시 에더리는 좋은 황제가 될 수 있겠지. 어쩌면 위대한 황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

락신은 물끄러미 지알데를 바라보았다. 지알데는 단호하게 말했다.

“황제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의 황제가 아니야. 자신을 증 오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황제여야 해. 그리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어. 폐하께서는 엘시를 사랑하는 자들만 남겨 줄 작정이 신 것 같지만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야. 언젠가 또 황제에 게 거역하는 자들이 나타날 거야. 황제를 깔보고 미워하고 혐오 하는 자들이 나타날 거라고. 그것은 절대로 막을 수 없어. 그러 니 황제는 그것을 없애려고 해서는 안 돼. 그것을 놔두어야 해.” 

락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칙은 그렇지.”

“실제는 다르다?”

“지알데, 엘시의 계승을 반대하는 자가 즉위 초기에 나타나는 것을 막는 데에는 의미가 있어. 원시제께서 그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으셨던 것은 대호왕이라는 선임자가 있었기 때문이지. 북부 는 돌아온 왕을 반겼고, 그 왕이 지명한 후계자에게 만장일치의 지지를 보냈어. 만약 원시제께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일에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 같은 업적은 불가능했을지도 몰라.”

“단 하나의 예일 뿐이야! 만약 엘시가 황위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면? 그렇다면 그는 즉위 초기에 반대 세력에 의해 물러 나야겠지. 하지만 폐하께서 반대 세력이 될 자들을 모두 없애 버 리셨기에 폭군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다면, 그러면 어쩔 텐가?”

“엘시가 폭군이 될 것 같지는 않군.”

“자네가 예언가인가?”

“나는 확률을 믿을 뿐이야. 확률 외에 무엇이 있나? 자네도 엘시가 폭군이 될 확률이 많다고 믿지는 않겠지.”

지알데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락신 치올은 허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내게 엘시가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도울 시간 정도는 남아 있을지 모르지. 자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야. 폐하께서는 황위 이양을 서두르시는 것 같으니.”

지알데는 무력감을 느꼈다. 락신은 이미 황제에게 찬성하고 있 었다. 삼고의 마지막 일원인 태위가 있다면 세력 차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완고한 대립각 외에는 세울 것 이 없다. 그리고 지알데는 대립 자체의 의의는 믿지만 그것이 소 비하는 시간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데라시를 바라 보았지만 황제의 첩이 그를 도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지알데의 생각은 틀렸다. 데라시가 그를 도와주었다.

“엘시 본인에게 물어보면 어떻겠습니까?”

“뭐?”

“결국 황위를 받을 사람은 엘시입니다. 그가 모든 정적을 제거 하고 황위를 이양받는 방식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알데는 두말 할 것 없이 엘시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 지만 그는 기뻐할 수 없었다. 엘시는 현재 시모그라쥬 공에게 억 류되어 있으니까.

그 사실을 말하려던 지알데는 문득 황제의 말을 떠올렸다. 치천제는 엘시가 돌아오도록 해 줄 사람이 엘시 가까운 곳에 있다 고 말했다. 만약 치천제의 말이 맞다면 엘시는 억류에서 벗어나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상식적이었다. 치천제가 엘시 를 계승자로 내정했다면 그에게 안전 보장을 해 줬을 것이 분명 하니까.

지알데는 데라시의 말에 동의했다. 데라시의 말대로 황위를 받 는 것은 엘시 자신이다. 따라서 엘시의 의사는 황제로서도 함부 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의 백 마디 주장보다는 엘시의 한 마디가 황제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지알데는 엘시가 빨리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다른 두 사람의 생각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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