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7
치천제는 하늘누리의 나루터에서 아래쪽의 상황을 냉엄하게 노려보았다. 보안의 필요성 때문에 황제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두 명의 금군이 있을 뿐이었다. 각자 이를 갈고 벼슬을 빳빳하게 세우고 있는 두 금군은 구레와 부악타였다.
흑사자 모피 덕분에 나루터에 서 있을 수 있는 황제와 달리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는 자신의 벽난로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보 온복은 그렇게 오랜 시간의 활동을 보장해 주지 않으며 그를 위 해 도깨비불을 만들어 줄 도깨비도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자신 이 보고 있는 광경을 데라시에게 전달했다. 곧 두 번째 벽난로 방으로부터 데라시의 공포스러워 하는 니름이 전달되어 왔다.
<저것이었군요. 암살공의 덫. 저렇게 많은 레콘이라니!>
<암살공의 격에 어울리는 것이군.>
<도대체 어떻게 저런 것을 준비했을까요?>
<그의 영지는 최후의 대장간으로 향하는 레콘들과 그곳에서 무 기를 받아서 나온 레콘들이 항상 지나치는 곳이니 어렵진 않았겠 지. 그리고 그 스카리 요새라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군. 어쩌면 락토는 요새를 짓는다는 소문을 퍼뜨려 일하러 온 레콘들을 모아 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겠군요. 어쨌든 어느 정도 세력 균형은 회복한 것 같군요.>
<균형이 고작이야. 그것도 오래 가진 않겠지.>
<예?>
황제는 전장을 내려다보며 설명했다.
<남쪽 본대 병력과 서쪽의 엉겅퀴 여단, 북동쪽에서 기병대가 공격하고 있지만 저 레콘들은 무너지지 않았어. 원래 무너질 것 이 없기 때문이야. 레콘의 단점이자 강점이지. 저들은 옆에서 무 슨 일이 일어나건 자기 싸움을 수행할 수 있어. 엉겅퀴 여단의 모습에 비하면 효율성이 떨어지지만, 아무리 비효율적이라도 저 건 레콘이야. 1 더하기 1로 2밖에 만들지 못한다 해도 그가 너무크군.>
〈그렇군요, 폐하. 그렇다면 제국군은 궤멸하는 것 아닙니까?>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사실이군.>
<폐하!>
<짐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데라시.>
데라시의 얼굴을 직접 본다면 사실을 말하는 것도 끔찍한 일이 라고 니르고 싶은 표정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라 시는 자신의 니름을 통제하려고 애썼고, 따라서 그의 니름에서 데라시의 속마음을 읽기는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폐하.〉
<사과할 것은 없어. 구레와 부악타도 당장 뛰어 내려가고 싶어 하는 것 같군.〉
따라서 그들은 제국군의 전투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황제를 금군의 임무는 황제를 지키는 것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그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처럼 갑자기 맹렬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금군들은 놀란 눈으로 하늘누리 쪽을 바라보았다. 하늘누리의 중앙 쪽 유수부에서 종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낯선 소리였지만 금군들은 그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하늘누리의 시 민들은 다 아는 소리다. 조금 늦게 고개를 돌린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는군.> “시작하는군.”
<예?> “예?”
데라시와 금군들이 동시에 질문했다. 치천제는 데라시의 질문에 대답했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가 짐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천경유수를 설득하셨습니까?>
<아니.>
<예? 설득하지 않으셨다고요?>
<그는 짐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아마 끝까지 그럴 것이다. 지 알데 락바이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는 지금 짐을 도울 것 이다. 잠시 입을 닫은 채 이 전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전투를 끝낸 다음 다시 짐에게 반대할 것이다. 반대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도울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치천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지금쯤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을 거다. 그는 천성이 그 런 인물이다. 전후 사정이 어찌되었건 저런 몰지각한 살해를 눈 뜨고 볼 수 없지.>
치천제의 예상대로였다. 천경유수는 유수부 천경 통제실에서 뜨거운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사람의 가치가 그렇게 급속도로 훼손되는 광경은 지알데 락바이를 참을 수 없게 했다.
“보안판
작동!”
주기적으로 보안판을 세심하게 점검했지만, 천경 통제실의 보 안판 담당자는 혹여나 바깥에 노출되어 있는 그 물건이 녹슬기라 도 해서 작동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만약 그런 사태 가 벌어진다면 천경유수는 틀림없이 그의 머리를 물어뜯을 태세 였다. 보안판을 작동시킨 담당자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고 싶 은 충동과 싸우며 작동 현황을 살폈다. 잠시 후 그는 하늘누리의 온갖 기묘한 설비들의 대부분을 설계, 제작한 도깨비 대장장이들 에게 그의 아내에게도 바치지 않았던 찬사를 보냈다.
하늘누리의 앞쪽, 하늘치의 머리 부분에 장치된 신묘한 장비들 이 움직였다. 가장 작은 구성품도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장 비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사자가 갈기를 흔드는 것 같았다. 엄청나게 거대하고 지독하게 복잡하지만, 보안판의 기본 원리는 말의 눈가리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하늘치의 거 대한 입 뒤쪽에 흩어져 있는 수천 개의 눈을 외부의 공격으로부 터 보호하는 장치다. 하늘치의 유일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눈 을 보호한다는 것은 황제와 하늘누리라는 제국의 가장 중요한 존 재들을 보호하려는 것이거나, 또는 그 존재들에게 닥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늘치가 공세에 나선다는 의미다. 이 경우에는 후자다. 보안판이 수천 개의 눈을 빈틈없이 가린 후 지알데 락바 이가 외쳤다.
“하강해라!”
미리 경고 타종이 있었지만 하늘누리의 시민들은 하늘치의 급격한 움직임에 기겁했다. 하늘누리의 이동 담당자들은 어떤 이동 에서도 탁자 위에 놓아둔 도깨비지가 떨어지지 않고 그릇에 부어 놓은 물이 넘치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자랑으로 삼는 다. 하지만 그 순간 하늘치는 하늘누리의 구조적 한계를 시험하 는 듯한 속도로 하강했다. 비로소 하늘누리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는 생물의 등 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유수부 통제실에서 지알데가 외쳤다.
“레콘들의 상공으로 접근해라!”
아래로 하강하던 하늘누리가 거대한 몸을 레콘들의 상공으로 이동시켰다. 갑자기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전쟁에 흥분해 있던 병 사들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거대한 물체의 이동은 보 거나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분전하고 있던 제국군 본대와 기병대, 스카리 요새군, 엉겅퀴 여단은 모두 하늘을 바라 보았다. 문득 쥘칸이 끔찍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본 다음 다시 스카리 요새군을 보았다. 모든 사실이 명백했다. 쥘칸이 외쳤다.
“모두 도망쳐! 서쪽으로 도망쳐!”
지알데 락바이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레콘 일만 명의 분 노가 부당하게 황제에게 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직접 알려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했겠지만 지알데 락바이는 대신 통제실의 유수부원들에게 외쳤다.
“이것은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의 명령이다!”
유수부원들은 다행히도 얼핏 듣기에 황당하게 들리는 그 명령 의 의미를 짐작할 정도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숨을 멈춘 채 지 알데의 명령을 기다렸다. 지알데가 외쳤다.
“수문 개방! 저수를 전량 방류해라!”
어떤 익살스러운 유수부원은 천경유수가 내린 명령이 흘레붙 은 개들에게 과부가 하는 짓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떠올리곤 호흡 곤란의 고통을 느꼈다. 하늘누리 아래쪽에 있던 레콘들도 비슷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고통의 원인은 완전히 달랐다. 참혹한 공 포 속에서 레콘들은 하늘누리의 옆구리에서 빛나기 시작하는 물방울들을 바라보았다.
하늘누리 시민의 식수원이 그 거대한 수조를 비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