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8
유수부 수도국원 오니 보는 자신이 하늘누리의 초강력 비밀 병 기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했다. ‘틸러 녀석 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숨넘어가겠군.’
오니 보는 하늘누리의 저수조가 그 물을 순식간에 전량 방출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수조에는 당 연히 있어야 하는 시설이다. 고여 있는 물은 상할 수 있고 수인 성 질환 같은 것이 발생할 경우 하늘누리는 심각한 타격을 입기 때문에 저수를 완전 방류하고 새로 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 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오니 보도 그 방류 시설을 점검하곤 한 다. 하지만 그 방류 시설이 대(對)레콘 병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니, 미리 생각했어야 하는 걸까? 한두 명의 레콘에게 그 많 은 물을 쏟을 필요는 없으니 상대가 레콘 부대일 경우에만 저수 방류는 유의미한 공격 수단이 될 터인데, 레콘 부대가 하늘누리 를 공격한다는 것부터가 어처구니없는 개념이니 오니 보가 그런 생각을 못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지금껏 하늘누리를 공격한 레콘은 황제 사냥꾼 한 명뿐이다. 하지만 오니는 레콘 부 대가 이미 존재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었다. 제국군에는 레콘 여단들이 포함되어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만약 그 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하늘누리는 그것을 제압할 수단을 가지 고 있어야 한다. 오니 보는 그런 만약의 경우를 가정해서 방류 시설이 설계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했다. 하늘누리가 저수 를 방류하는 모습은 그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특이한 것이었다. 초당 방류량 천 톤. 수도국원 오니 보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수치다. 그 막대한 수량을 일시에 뿜어낼 수 있는 것은 무수히 많은 방류관 덕분이다. 그런데 그 방류관들은 하늘누리 아래쪽의 모든 방향과 모든 각도를 대부분 포함하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 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부터 수평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는 것, 높은 수압을 이용하여 위쪽으로 쏘아지는 것까지 있었다. 그 때문에 하늘누리의 거대한 몸이 덮는 것보다 몇 배나 넓은 지역 에 살수가 가능했다. 방류관이 많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수도 관을 보호하려면 수압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하지만 단순 한 방류를 위해서라면 그런 복잡한 배치를 할 필요가 없다. 모든 방류관이 일시에 개방된 모습을 보며 오니는 그것이 원래부터 되 도록 넓은 지역에 살수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되었음을 확신 했다. 그 순간 하늘누리는 같은 크기의 구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폭우 발생기였다.
오니는 아래쪽의 레콘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하지 만 경고 타종이 있은 후에는 급격한 움직임 때문에 추락이 일어 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늘누리 외곽으로의 통행이 금지된다. 오니 보는 다시 생각했다.
‘본 것이 없다고 말하면 틸러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할 텐데.’
오니 보라는 유수부 수도국원에게 목격담을 전달하기 위해서 는 아니지만, 팔리탐 지소어는 전장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관찰 했다.
하늘누리에서 쏟아지는 파괴적인 낙수를 바라보던 팔리탐 지 소어는 자신이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차 분함의 원인을 찾던 팔리탐은 주군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깨달았 다. 자신이 차분한 것은 주군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암살공의 호 인형 얼굴에는 어떤 긴장감도 초조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팔리탐 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싶은 기분을 억눌렀다.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순간이다. 아직 정식 명칭을 부여하 지 않았기에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스카리 요새군은 암 살공이 긴 시간 동안 구상하여 힘겹게 완성한 회심의 무기다. 그 런데 압도적인 제국의 힘에 대항하여 암살공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병기가 지금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공포에 정신을 잃 은 레콘들이 사방으로 도주하면 스카리 요새군은 순식간에 와해 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니, 농후하다. 그러면 암 살공은 패망한다. 사라티본 평야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로 그런 일이다. 하지만 암살공은 주먹으로 뺨을 받친 채 느긋하기까지 한 태도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시원하게 쏟아 붓는군.”
방패를 든 채 뻣뻣하게 경직해 있던 암살공의 참모들이 한숨을 내쉬거나 헛기침을 했다. 어떤 이는 사레가 들려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무심히 방패를 내린 참모는 화들짝 놀라 그것을 들어 올렸다. 보이지 않는 아기살은 그것이 계속되고 있는지, 아 니면 중단되었는지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암살공은 목숨 이외의 모든 것을 잃을 가능성을 바라보고 있었고, 또한 목 숨을 잃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락토 빌파는 그 낙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누리가 이동 수도로서 독립 수원을 탑재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가 일만 레콘의 원한을 사는 것을 두려워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따라 서 하늘누리의 낙수 공격은 충격적이지만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 다. 바로 그렇기에 락토 빌파는 스카리 요새군 일만 명 전원의 출전을 명령했다. 팔리탐은 그것을 반대했다. 이삼천 명으로도 바라는 효과는 충분히 얻을 수 있을 테니 그 정도만 출전시키자 는 것이 팔리탐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락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삼천 명이면 잃어도 된다는 건가?’
‘칠팔천 명은 남습니다. 각하. 레콘 칠팔천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도 이삼천 명 정도만 잃으면 되겠군. 그 다 음에도, 네 번쯤은 그럴 수 있겠군. 그 다음에는 뭐가 남지? 쥐 딤의 재현?’
팔리탐은 나약한 낙관론밖에 제시할 것이 없었다.
‘도망친 레콘들이 다시 귀환할지도 모릅니다.’
‘나도 얼마나 돌아올지 궁금하군. 전부 내보내.’
팔리탐은 웃기는 전투라고 생각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고 비장한 전투지만, 웃기는 전투다. 제국군 수뇌부 측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긴다는 생각을 포기했을 것이다. 아마도 최대한 많은 수의 제국병들을 구출해 내는 것으로 전투 목적을 변경한 지오 래일 것이다. 그런데 발케네 측에서는 처음부터 이길 생각이 없 었다. 암살공은 낙수의 공포에서도 침착을 잃지 않은 채 돌아오 는 레콘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사라져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있 었다. 그리고 돌아온 레콘들만 데리고 전쟁을 수행할 작정이다. 따라서 발케네 측의 관점에서 사라티본 전투는 전투라기보다는 대규모 선별 작업이었다. 선별 작업을 통과한 레콘의 숫자에 따 라 향후 전쟁의 형태가 결정될 것이다.
팔리탐 지소어가 마음속으로 그어 둔 한계선은 삼천 명이었다. 그 숫자로도 발케네를 보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 이하라면 팔리탐이 보기에 발케네 공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노 후 대비책은 자결이다.
‘쉽지 않은 도박이지.’ 모욕에 가까운 평가다. 모든 것을 건 도박을 하는 어떤 도박꾼도 암살공의 배짱에 자신의 배짱을 비교 할 수 없을 것이다. 강인한 의지일까, 자포자기일까. 둘은 사실 구별하기 어렵고 그저 결과에 의해 판정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역사가 기록을 책임지기로 한 모든 위인들 중 자포자기했던 행운 아가 몇 할 정도나 포함되어 있는지는 결코 밝혀지지 않겠지만 그 비율은 0보다는 분명히 클 것이다. 만약 자포자기라면 그 원 인은 무엇일까.
팔리탐은 스카리와 헤어릿을 생각했다. 암살공의 자녀들. 아버 지를 혐오하는 아들과 증오하는 딸. 두 사람은 락토에 대해 자신 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다지 숨기지 않았지만 반대로 락토는 자 녀들에 대한 논평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 대한 락토의 태도는 통제가 가능하면 감정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쪽이다.
하지만 그 통제는 실패했다. 팔리탐은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락토에게 통제당하지 않는다. 스카리가 부냐 헨로를 데리고 온 행동은 무수히 많은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빌 파 가문에 한정 지어 볼 때는 가문에 생긴 봉합할 수 없는 균열 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팔리탐이 깨달을 수 있는 것 이니 락토 또한 알 것이다. 팔리탐은 락토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 하는지 궁금했다.
낙수가 멈췄다.
당장 식수를 공급해야 하는 천경 시민들이 있기 때문에 하늘누 리는 모든 물을 쏟아 붓지는 않았다. 하지만 파괴적인 낙수가 끝 나자 전장은 거대한 수렁으로 바뀌었다. 그 속에 레콘들이 서 있 었다.
살수 지역 외곽에 있던 레콘들과 쥘칸 장군의 외침을 들은 엉 겅퀴 여단의 레콘들은 간신히 낙수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 수 지역 중앙에 있던 레콘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수는 적지 않았다. 적어도 수천은 되는 것처럼 보였다. 살수 지역 바 깥으로 도망친 레콘들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그 레콘들을 바라보 았다.
엉겅퀴 여단 1대대장 팡탄 하장군 또한 물을 피하지 못한 레콘 들 중 하나였다. 서까래 같은 양손검을 들고 날뛰는 레콘과 어울 리느라 팡탄 하장군은 하늘누리가 접근하는 것도, 쥘칸 장군의 명령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떨어지는 물이 그를 때린 것은 하늘 로 높이 치솟았을 때의 일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물에 맞아 곤두박질쳤다.
팡탄 하장군은 푹 젖은 깃털 속에서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레콘들이 여기저기 기절한 것처럼 쓰러져 있었고 알 수 없는 소리 를 내지르며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레콘도 보였다. 팡탄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쓰러져 죽는 게 행운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밖에는. 앞쪽에 있는 커다란 레콘을 보았을 때도 팡탄은 산이나 언덕을 보듯 무감동했다. 그것은 힌치오였다.
힌치오는 이쑤시개의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그 칼은 땅에 깊 숙이 꽂혀 있었고 힌치오는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칼이 없었다 면 그는 당장 쓰러졌을 것이다. 힌치오를 바라보던 팡탄은 머릿 속에서 뭔가가 꾸물거리는 기분을 느끼고 벼슬 근처를 헤집었다. 그러나 손에 닿는 젖은 깃털의 감각은 소름 끼쳤다. 팡탄은 손을 떼며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힌치오가 고개를 들었다. 힌치오 의 두 눈 또한 생기를 잃고 있었다. 당장 칼을 휘둘러 자신의 목 이라도 자를 듯한 표정을 한 채 힌치오는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그가 갑자기 몸을 똑바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