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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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10


파라말 아이솔은 추위를 느꼈다. 4월이었다. 제국 최북단의 이 땅에도 여름이 찾아든 지 오래였다. 미지근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여름이지만 어쨌든 여름이었다. 하지만 파라말은 옷을 더 입고 올걸 하는 느낌을 받았다.

제국 정부의 고위 대신이 걸어가고 있는데도 제국병들은 방만 한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그들은 양지바른 곳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고 있거나 옷을 벗어 바느질을 했고, 어쨌든 똑바로 서서 대신에게 예의를 표할 생각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는 듯했다. 그 도 그럴 것이, 그들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파라말은 신분 을 나타낼 만한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왔다. 그래서 제 국병들은 파라말이 함께 걸어가고 있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술 자쯤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발 앞쪽으로 투구가 굴러 왔을 때 파라말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라말이 투구를 주워 들자 옆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 려왔다.

“어, 젊은 양반, 고마워. 이쪽이야.”

파라말은 하늘누리에서 도저히 들을 수 없는 호칭에 미소를 지 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미소는 일그러졌다. 산공부사 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늙은 제국병에게는 반대편 팔이 없었 다. 팔 없는 전사라는 것은 눈 없는 화가만큼이나 어이없고 슬픈 존재다. 파라말은 감정적 동요를 애써 누르며 그를 향해 걸어갔 다. 척 보기에도 30년 근속 휘장쯤은 가지고 있을 것 같은 교위 였다. 파라말은 그에게 투구를 건네려다가 생각을 바꿔 그의 무 릎에 내려놓았다. 교위는 씩 웃으며 투구에 손을 얹었다.

“이거, 무겁지는 않은데 부피가 있어서 한 손으로는 다루기가 버겁단 말이야.”

“이번 전투에서 그렇게 되셨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예?”

“돌 틈에서 찔찔 울고 있는 하전사 녀석을 꺼내려다가 돌이 무너져 팔이 끼었거든. 하전사 놈이 교위님 팔을 잘라 먹은 거지. 못된 놈.”

“그 하전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위는 턱으로 하늘 쪽을 가리켰다.

“내 팔 가지고 저 위로 갔어. 두 배로 못된 놈이지. 카악, 퇘!”

교위는 가래를 탁 뱉고는 입 주위를 쓱 닦았다. 그러자 투구가 무릎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파라말은 재빨리 그것을 붙잡아 다시 원래 자리에 놓아 주었다. 교위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 산공부에서 온 기술자지? 성벽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알아보려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알아야 또 당하지 않지요.”

“알아내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파라말은 감탄했다. 고참 교위의 발언에는 경험에서 체득한 것 이 분명한 전술적 통찰력이 담겨 있었다. 산공부에서도 암살공이 코네도 성을 무너뜨린 방법이 쉽게 재현 가능한 것이라면 성에 의지한 방어 전략이라는 것이 전쟁사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임을 직감하고 기술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예. 성이라는 것이 사라지겠지요. 아니면 전혀 새로운 축성술 이 고안될지도 모르고요.”

교위는 파라말의 말에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암살성을 안 쪽으로 무너뜨려 빌어먹을 암살공 놈을 돌무덤에 묻어 버릴 수 있다는 거 아닌가?”

파라말은 가슴이 철렁했다. 교위는 복수를 말하고 있었다. 똑 같은 방식으로 상대에게 돌려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파라말이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코네도 성 낙성 직후 일어났던 무차별 살육은 하늘누리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을 체포하여 즉 각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을 진행 중인 장수에 대한 처 벌은 불가능하다거나 제국군 장교에 대한 처벌은 태위청의 소관 이라는 사실은 격분한 천경유수에겐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허릭은 자신이 하늘누리로부터 명령을 받았음을 증 언했다. 하늘누리가 대명사로 사용될 때는 물론 황제의 뜻을 의 미한다. 황궁은 시허릭의 증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긍정으로 해석되었다. 아무도 황제의 뜻을 위조할 수는 없으니 긍정일 수밖에 없다. 그 길로 황궁으로 달려간 지알데 락 바이는 앞을 막아서는 금군 구레에게 노성을 질렀지만 구레는 꿈 쩍도 하지 않았다. 구레는 삼고의 지위를 존중하여 폭력은 사용 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겐 그럴 권리도 있음을 시사했다. 천경유수 는 그 경고에 겁을 집어먹기는커녕 더욱 화를 냈지만 뒤따라간 유수부원들은 겁을 먹었다. 그들은 천경유수를 강제로 끌고 나와 야 했다.

지알데 락바이의 행동은 그의 유별난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아 니라 비극의 밤에 대한 하늘누리의 견해를 웅변적으로 나타낸 것 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무차별 살육은 범죄다. 입 밖으로 꺼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황제가 심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의 일원으로서 파라말은 이곳에 내려와 죄의식에 시달리는 병사들을 볼 것이라고 예상했다. 파라말은 파괴된 자신을 필사적 으로 추스르는 병사들 사이를 걷게 될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그의 앞에 있는 교위는 보복을 말하고 있었다. 그 많은 피로도 부 족하다는 태도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증오는 도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 많은 피를 삼키고도 아직도 불타고 있는 것일까.

파라말은 아직 이름을 모르는 교위를 바라보았다. 팔을 잃은 것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 모양이다. 투구를 제대로 붙잡기 어렵 다는 것 이상의 많은 불편과 고통을 겪고 나면 자신의 상실에 대 한 절절한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교 위는 잃어버린 팔에 대해 분노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파라말 에겐 발케네 공이 행한 일 자체에 대해 분노한다는 것은 걸맞지 않는 일처럼 느껴졌다. 발케네 공은 최선을 다해 승리의 방법을 찾아내었을 뿐이다. 그것은 전쟁에서 당연한 일이고 덕목이기까 지 하다. 발케네 공의 행동 또한 분노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전 우의 희생? 성벽 붕괴는 극적이긴 하지만 사상자는 이천 명에 못 미친다. 그것이 결코 작은 숫자는 아니다. 그러나 코네도 성에서 희생당한 사람의 숫자는 그 열 배가 넘는다. 파라말은 열 배의 민간인 희생자를 강요하고도 아직 분노할 수 있다면 몰염치한 수 준을 넘어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라말은 교위에게 무엇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이냐 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전투를 치른 직후의 군인에게 그것은 너 무도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 될 수 있다. 파라말은 의심과 불만 속에 교위를 떠났다. 그는 다시 추위를 느꼈다. 기술자들을 현장 에 남겨 놓고 다시 하늘누리로 올라온 후에도 한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늘누리는 분주했다. 그것은 정치 도시이고 전쟁이 벌어지면 위축되는 시장이나 극성을 띠게 되는 암시장 같은 것은 없다. 하늘누리의 분주함은 전쟁 업무 때문이다. 평소와 다른 모습은 곳 곳에서 달려가는 제국병들의 모습뿐이었다. 하늘누리에서 이용할 수 있는 이동 수단은 자신의 두 발뿐이므로 병사들은 씩씩하게 달려갔다. 그리고 파라말 또한 자신의 두 발을 이용하여 태화각 을 향해 걸어갔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데라시의 전언을 발견한 파라말은 황궁을 향해 역시 두 발로 걸어갔다.

하늘누리의 다른 지역과 달리 황궁의 분위기는 고요했다. 다만 금군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에게 꽤 알려져 있는 오뢰 사수나 구레 외에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다른 금군들도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파라말은 황제가 왜 황궁 경비를 강화시켰는 지 생각해 보았다. 아래쪽에서 일어난 일과 일어날 일에 대해 해 명도 변명도 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그래서 접근을 금하는 것일 까? 아니면 단순히 전쟁 때문에 황궁 경비가 강화된 것일까? 파 라말은 그것에 대해 데라시에게 질문해 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데라시의 방으로 들어가 무더운 공기를 쐬니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4월, 계절은 분명 여름이었지만 데라시의 방 벽난로는 기운차 게 불꽃을 펄럭였다. 파라말은 근처에도 가기 싫은 벽난로 바로 앞자리에 데라시가 앉아 있었다. 파라말은 어깨를 으쓱였다. 

“되도록 멀리 떨어져 앉고 싶군요.

“덥겠지요. 하지만 제 귀가 어두우니 그건 안 되겠군요.” 

둘 다 과장이다. 방 안에서 아무리 거리를 둔다 한들 시원해질 리도, 목소리가 잘 안 들릴 리도 없다. 파라말은 데라시에게 다 가가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코네도 성 파성에 대해서는 조금 전 조사를 시작했고 잔해 때문에 적절한 설명을 찾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부사가 아래로 내려갔기에 부른 겁니다. 아래의 분위기를 좀 전해 듣고 싶군요.”

“분위기요?”

“예. 병사들의 분위기.”

문득 파라말은 자신의 대화 상대가 한 명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데라시와 니름으로 연결되어 있는 치천제가 이 대화에 참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가 파라말에게 보 고를 받고 싶다면 직접 불러서 대화할 수도 있다. 파라말은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했나 궁금해하며 입을 열었다.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병사들은 락토 빌파에게 받을 것이 많 이 남았다고 여기는 것 같더군요. 저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해하기 어렵다고요?”

“분풀이는 이미 있었습니다. 지나친 분풀이였지요. 분풀이할 것이 뭐가 더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데라시는 갑자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파라말은 놀라서 그가 허물벗기라도 하나 생각했다. 데라시는 벽난로 쪽을 돌아보며 목 의 비늘을 살짝 부딪쳤다.

“예, 지나친 분풀이였지요.”

파라말은 다시 이곳에 황제가 참가하고 있다는 가설을 떠올렸 다. 파라말은 황제에게 질문하듯 말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그 파성 때문에 제국군이 입은 피해는 이천여 명 정도입니다. 그 이천여명 중 귀하지 않은 목 숨이야 있겠냐마는, 그 정도 피해는 이런 거대한 규모의 전투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피해 때문에 제국군이 민간인을 주살한 예는 없습니다. 제국군이 살인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분풀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마치 누군가의 앞에서 파라말을 거들듯이 말하는 데라시를 보 며 파라말은 자신의 직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파라 말은 좀 더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라시가 그를 돌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부사가 할 일이 있습니다. 헨로 가를 관찰하는 일은 그만해도 됩니다.”

파라말은 입맛을 조금 다시고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데라시는 옆으로 손을 뻗어 두루마리를 집어 올렸다. 파라말은 그 호화스러운 두루마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데라시는 그것 을 파라말에게 내밀었다. 파라말이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자 데라시가 말했다.

“부사는 유수부차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즉각 유수부 경비국을 장악한 다음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를 자택에 유폐하도록 하십시오. 죄명은 황궁 내 소란입니다. 그리고 유수부차사로서 천경 유수의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십시오.”

파라말의 손에서 두루마리가 툭 떨어졌다. 데라시는 그를 물끄 러미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여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가 다 시 허리를 폈을 때 파라말이 말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알아들었을 텐데요.”

“유, 유수부차사라는 것은 없습니다. 유수부는 사도의 휘하에 있는 것이 아니며…”

“새로 생겼습니다.”

“저는, 어, 제가 어떻게…….”

“금군이 유수부를 장악하도록 도와줄 겁니다.”

파라말은 넋이 나간 채 생각했다. 왜 금군이 많이 나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파라말은 갑자기 사고가 명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쥐어짜듯 말했다.

“이 전쟁은 무엇입니까?”

데라시는 두루마리를 파라말의 무릎에 툭 던졌다. 파라말이 엉 겁결에 그것을 붙잡자 데라시는 말했다.

“가서 명령을 수행하십시오, 유수부차사.”

데라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파라말은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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