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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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9


그 어색한 글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락토는 각 문장의 첫글자 만 읽어 보았다. 그리고 발케네 공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사 라티본에서 겪은 일에 상당히 상심했음을 알게 되었다. 락토는 편지를 고이 접어 놓은 다음 말했다.

“회답을 보내야겠군.”

락토의 명령에 따라 힘 좋은 레콘이 성루 위에 뛰어올랐다. 잠 시후 거대한 바윗덩이가 제국군을 향해 날아갔다. 자칫하면 병 사 수십 명을 다치게 했을지도 모르는 바윗덩이는 일시에 뛰어오 른 몇 명의 레콘들에 의해 허공에서 붙잡혀 끌어내려졌다. 시허 릭은 그 회답의 의미를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아라짓력 4월 2일, 코네도 성 공략전이 시작되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오뢰사수의 출동을 요구했지만 황제 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의 대답은 ‘금군은 황제를 위해 봉사 한다.’는 것이었다. 규리하 전쟁 당시 엘시의 요청이 있었을 때 치천제가 오뢰사수들을 주저 없이 내주었던 것과 비교하면 좀 기묘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시허릭은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에 겐 엉겅퀴 여단 외에도 고추냉이 여단과 왜솜다리 여단이 있었 다. 제국군의 역사에서 이토록 강력한 병력을 지휘한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시허릭은 여기에 오뢰사수까지 요구하는 것은 좀 염치없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겐 오뢰사수 의 공격보다는 덜 극적이지만 살상력은 오히려 그 이상인 부대도 있었다. 시허릭의 첫 번째 명령은 바로 그 부대에 떨어졌다.

원래 헨로 중대의 위치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믿어지는 운하 바로 곁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니어엘은 독립 중대는 자 기 판단에 따라 기동성 있게 움직여야 함을 이유로 들어 넓은 배 후지를 원했다. 따라서 제국군의 첫 번째 공격은 그들의 머리 위 로 세차게 날아가는 수많은 아기살이었다. 검은 구름처럼 날아간 아기살이 코네도 성 안쪽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제국군은 가슴이 설레었다. 시허릭은 지체 없이 레콘 여단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 렸다.

엉겅퀴 여단은 성 동쪽에서, 왜솜다리 여단은 성의 남쪽에서 일거에 쇄도해 들어갔다. 땅이 쿵쾅쾅쾅 울렸고 자욱한 먼지구름 이 수십 미터 이상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조금 기 묘했다. 성으로 다가갈수록 발소리는 커졌지만 보폭은 오히려 줄 어들었다. 따라서 전진 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코네도 성벽에서는 장대한 물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락토 빌파는 일을 대충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가 배치한 소화차 는 성벽이 넓은 폭포로 보일 지경으로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물줄기는 이미 속도를 늦추고 멈춰 있는 레콘들에게 닿지 않았다.

시허릭은 땀 때문에 미끌미끌해진 손바닥을 비비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콘들의 돌격에 대한 반응은 틀림없이 수공일 것이 다. 엉겅퀴 여단장 쥘칸과 왜솜다리 여단장 무타루는 모두 그 예 상에 동의했다. 그리고 물을 쏘도록 유인하라는 시허릭의 요구에 대해서는 굉장히 난감한 반응을 보였다. 작전대로 진행되는 상황 을 보면서도 시허릭은 레콘들이 과연 흥분하지 않고 안전하게 퇴 각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그리고 시허릭은 쾌재를 올렸다.

왜솜다리 여단과 엉겅퀴 여단은 침착하게 뒤로 물러났다. 미리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철저하게 교육시킨 것이 보람이 있었다. 시허릭은 젖어 있는 바닥을 향해 제국군 본대를 진격시켰다. 성 으로 다가가는 것이지만 또한 젖은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제 국군 본대는 기운차게 돌격했다. 젖은 땅으로 들어가면 사라티본 부대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 거대한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돌격하는 제국군 사이에서 사다리들이 머리를 세우는 뱀처럼 들어 올려졌다. 독을 뿜을 듯 머리를 들어 올린 사다리들이 성벽 에 걸렸다. 쿵, 쿠쿵!

만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시허릭은 조금 후 고개를 갸 웃했다. 사다리가 내는 소리치곤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 컸다. 참 모들도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첫 번째 제국병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 헤아릴 수 없 이 많은 제국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쿵, 쿵!

시허릭은 다시 당황했다. 코네도 성에서는 아무런 반격이 없었 다. 화살이 날아오지도, 돌을 던지거나 기름을 붓지도 않았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병사들도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 반격이 없다고 해서 도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뒤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병사들 때문에라도 그것은 불가능 했다. 쿵!

돌격이 시작되었기에 사격을 멈춘 니어엘 헨로도 기묘하다는 표정으로 코네도 성을 바라보았다. 이미 병사들의 물결이 성벽을 뒤덮었지만 성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들려오는 것은 제국 병들의 함성과 원인 모를 충격음뿐이었다. 쿵! 쿵!쿵! 그때 니 어엘 헨로의 근처에 있던 가리아 릿폴 부위가 의아해하는 목소리 로 말했다.

“중대장님, 레콘들이 또 돌격하기로 되어 있습니까?”

“왜?”

“땅이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 성은 분명히 흔들리는 데요.”

니어엘은 그 말에 당황하여 코네도 성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 다. 그리고 가리아의 지적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성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도 쿵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러했다. 순간 니 어엘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전령! 사령부로 즉각 전달해! 후퇴해야 해!” 니어엘이 비명을 지른 순간 일이 벌어졌다.

먼저 성벽에 걸쳐져 있던 사다리들이 아래로 쓰러졌다. 제국병 들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전우들에 놀랐다. 그리고 혼란 에 빠진 제국병들의 머리 위로 코네도 성이 서서히 기울었다. 먼 곳에 있는 헨로 중대원들이 보기엔 마치 거대한 손바닥이 개미 떼를 누르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개미 떼는 제국군 본대 였다.

아래로 기울어지는 성벽을 보며 시허릭은 니어엘이 깨달은 것 을 그대로 깨달았다. 성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앞에 집중되어 있는 제국병들의 머리 위로. 시허릭의 극도로 흥분된 의식 속에 서 성벽은 지독하게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시 허릭은 그것이 기울어지다가 그냥 멈출지도 모른다는 소망마저 품어 보았다. 하지만 멈추기는커녕 성벽은 점점 빠르게 움직였 다. 실제로는 이삼 초에 불과한 시간이었으나 시허릭에겐 이삼 년 같았다.

시허릭의 3년이 지났을 때 성벽은 돌의 급류가 되어 제국병들 을 난타했다.

“안 돼!”

어떤 명령도 불가능했다.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시허릭은 덜덜 떨면서 코네도 성을 바라보았다. 절규는 들리지 않았다. 성 이 무너지는 굉음 때문에 모든 소음이 묻힌 탓이다. 아무것도 보 이지 않았다. 거대한 먼지구름이 모든 것을 뒤덮은 탓이다. 비명 도 피도 없었다. 그저 땅이 흐느끼는 소리와 자욱한 먼지구름뿐 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허릭은 그 먼지구름이 가라앉지 않기를 기원했다.

굉음에 말을 멈춰 세운 락토 빌파는 매서운 눈으로 코네도 성 이 있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듯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 성이 있던 자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코네도 성 북쪽의 산마루였다. 그의 주위에 는 별다른 병력이 없었다. 파리조군과 소환군은 그의 북쪽에서 파리조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락토는 산마루에서 성안에 남아 있던 사라티본군과 소화차 부대가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곧 먼지구름 사이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사라티본군의 레콘들이 소화차를 작동시켰던 인간 병사들을 데리고 먼지구름의 북쪽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코네도 성의 주민들은 제국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라고 명령해 두었다. 어차피 성벽의 전면부가 완전히 사라졌으니 저항할 수도 없을 것이다. 락토는 제국군이 무방비의 주민들을 어떻게 대할지 궁금했다. 도덕적인 군대라는 말은 모순이고 끔찍한 타격을 입은 부대의 지휘관은 애꿎은 피로 부하들의 공포를 닦아 내는 일을 시도하기도 한다. 무너진 성벽에 깔려 죽은 제국병보다 더 많은 숫자가 살해될까?

락토는 생각했다. 그러려면 시허릭은 꽤 오랜 시간을 소모해야 할 거라고. 락토는 쾌활한 기분으로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하늘누리와 제국군은 충격에 빠졌다.

코네도 성을 무너뜨린 기술은 꽤 정교했다. 일반적으로 건축물 은 아래로 붕괴되게 되어 있지만 코네도 성은 앞쪽으로 비스듬하 게 쓰러졌다. 되도록 많은 타격을 입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 게 무너뜨린 것이 분명했다. 성벽을 그런 식으로 무너뜨리기 위 해 정확히 어떤 기술이 사용되었는지는 당장 알아낼 수 없었다. 무너진 잔해 아래에 혹 있을지도 모르는 생존자를 구출하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시허릭은 락토가 예상한 보복 행위에 돌입하지 않았다. 레콘 여단이 모두 동원되어 잔해를 치우는 작업에 투입되었 다. 운하를 팔 때 사용되던 기술과 도구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하지만 잔해를 안전하게 치우는 것은 무작정 땅을 파는 것과 완 전히 다른 일이다. 이차 붕괴를 막으려면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 그 때문에 레콘의 무지막지한 힘에도 불구하고 잔해를 치우 는 속도는 느렸다. 잔해 속에서 발견된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겨우 발견된 생존자들은 오히 려 죽은 전우들을 부러워했다. 몸 이곳저곳이 으깨진 상태로 죽 여 달라고 외치는 병사들 때문에 일찍 찾아온 밤은 무시무시 했다.

그리고 그 무서운 밤의 절정은 하늘누리로부터 보복 명령이 내 려왔을 때 이루어졌다. 9세 이하의 아동과 59세 이상의 노인을 제외한 모든 코네도 성 주민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분 노에 미쳐 있던 시허릭은 그 부당성에 대해 의심조차 할 수 없었 다. 한쪽에서 구조 작업이 펼쳐지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무차별 살해가 벌어졌다. 나이를 확인하고 죽이는 귀찮은 일은 대부분 생략되었다. 누가 봐도 젖먹이로 보이는 아이나 지팡이 없이는 걷지도 못하는 노인만이 안전했다. 그리고 비명은 구조 현장에서 도, 살해 현장에서도 똑같이 처절했다.

아침은 죽은 이들에겐 영원히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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