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9장] – 불씨의 비행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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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9장] – 불씨의 비행 6


한 무리 철새가 파리조의 낙조 속을 날고 있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으니 철새들도 지친 날개를 접을 시간이다. 그러나 파리조의 바위땅에 철새들이 쉴 곳은 없었다. 철새들은 높은 고도에 남아 있는 햇빛을 따라가듯 높게만 치솟았고 땅을 향해 내려오는 새는 보이지 않았다. 시인의 흥취를 자극할 광경 을 보면서 락토 빌파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놀랐다. 저 미물이 내 땅을 밟지 않는다는 사실에 내가 화를 낸단 말인가? 락토는 아들의 말을 떠올렸다.

‘옛날 일 들춰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노화의 증거입니까? 락토는 자신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새해가 오면 마흔아홉이 된다. 남자가 진짜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다. 늙었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다. 하지만 스카리의 말에는 그 자신도 이해하 지 못한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남자로서의 노화는 멀었지만, 아버지로서의 수명은 다하고 있 었다. 그것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들 없이는 아버지도 없는 법이니까. 락토는 그 사실에 대해 초연하고자 했다. 쉽지 않았다. 사라진 후에야 소중함을 느끼는 것들이 있다. 락토 에게는 아버지라는 지위가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성실한 아버지 이고자 한 적이 없었고 그 지위를 은근히 무시하는 쪽이었다. 스 카리의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것을 이어받을 아들 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위한 배려였다. 락토는 계승 경쟁 때문에 힘이 낭비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둘 이상의 계승 후보는 결국 관련자 모두가 편 가르기에 돌입하게 만든다. 쓸데 없는 낭비다.

그런데 지금 락토는 다른 종류의 낭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느꼈다. 왜 한번도 아버지로서의 시간을 가지지 못 했을까. 아들은 기다려 주지도 않고 어른이 되었다. 독립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에게 줄 시간은 없다고 말했다.

‘제 남은 시간은 모두 부냐의 것이니까요.’

문밖에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락토가 자신을 더 통 제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거의 천성에 가깝게 단련 된 교활함과 집중력으로 락토는 순식간에 자신을 회복했다. 틈을 보일 수 없다. 그것은 죽음이다. 책상 옆으로 돌아와 선 락토는 담담한 태도로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다.

문이 열리고 시종장이 들어섰다.

그리고 아실이 약간 흐트러진 걸음걸이로 따라 들어왔다. 락토는 큼직한 주먹으로 책상을 짚은 채 아실을 바라보았다. 똑바로 서는 능력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좌우 대칭이 맞지 않는 눈과 고약을 붙인 뺨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아래로 모든 것이 삐딱했다. 눈이나 뺨은 원래 그렇지만 다른 것은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임을 락토는 간파했다. 락 토는 씩 웃으며 시종장에게 나가 봐도 좋다고 말했다. 시종장이 물러가자 아실의 흐트러짐은 극적으로 변했다. 아실은 비스듬한 얼굴로 락토를 올려다보며 한쪽 발끝을 까딱거리기까지 했다. 락 토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내가 무섭냐?”

아실의 하나뿐인 눈이 커졌다. 사태를 깨달은 그녀는 체념한 표정으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 기 위해 일부러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지만 발케네 공을 속여 넘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실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곳에는 앉을 의자가 없었다. 묘한 일이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접견자 는 앉혀 두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락토의 방에는 그런 용도의 가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실은 그것으로 대화를 시작하기로 했다. 

“앉을 곳이 없네요, 공작님.”

“서 있는 사람이 말을 빨리 하거든.”

“그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서 있는 사람은 위험하잖아요?” 

“아아. 이야기를 듣지 못했구나. 이 방 안에는 도깨비감투를 쓴 감시자가 있단다. 네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면 즉각 목을 날려 버리라는 명령을 받은.”

아실은 당황해서 주위를 재빨리 둘러볼 뻔했다. 하지만 아실은 곧 자신을 다잡았다. 둘러본다고 해서 도깨비감투를 쓴 사람을 볼 수 있을 리도 없거니와, 아실은 그 이야기 자체를 믿을 수 없 었다.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감투를 쓴 감시자는 서 있는 사람보다 백 배는 더 위험할 테니까.”

락토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암살공에게 보이지 않는 수호자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길 더 좋아하지. 너와의 대화가 즐거울 것 같구나. 사실 이곳에는 의자가 있다. 스카리가 앉곤 하는 곳이지. 헤어릿도 한 번 앉은 적이 있다. 네가 세 번째가 되겠구나.”

락토가 책상의 어딘가를 만지작거렸다. 아실이 본 것은 그것뿐 이었다. 하지만 곧 책상의 일부가 떨어지며 의자가 되었다. 아실은 감탄했다. 가구 장인의 교묘한 솜씨로 만들어진 그 의자는 책 상에 붙어 있을 땐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실이 의자에 앉은 다 음 락토도 책상 뒤편의 자기 의자로 돌아갔다. 그는 아실의 뺨에 붙어 있는 고약을 바라보았다.

“멋진 훈장이 되겠구나, 병사.”

“감사합니다! 쑤전사님! 그런데 애인이 이 모습도 사랑해 줄까요?”

락토는 웃음을 터뜨렸다. 완전히 허물어지는 느낌이었고 틈을 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마저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락토는 창피스레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며 헐떡거렸다.

“도대체….. 참 대단하군. 제국군이랑 많이 싸워서 그런 흉내 를 낼 줄 아는 거냐?”

“뭐 그렇죠.”

“그 나이에 온갖 경험을 다했군.”

“산전수전 다 겪었죠. 남아 있는 눈 하나 마저 파내서 안주거 리로 삼겠다고 말하는 살인광과 술 마신 적도 있어요. 정신이 그 런 상태라서 제국군에서 쫓겨난 사람이었죠.”

아실은 자신의 뺨에 붙어 있는 고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각하. 그러니 며느님 되실 분을 너무 책망하지 마세요.”

락토는 며느님이라는 말에 당황했다. 전혀 생각도 못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너를 부른 이유는 부냐 헨로에 대한 변호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내 며느리가 아니야.”

“아드님의 생각은 다른 것 같던데요.”

“그 얼빠진 놈의 이야기는 하지 마라.”

“각하의 아드님이잖아요.”

“계속 그 녀석의 이야기를 하면 네 눈을 파내서 간식 삼아 먹겠다.”

아실은 입을 다물었다. 발케네 공은 자신이 했던 무시무시한 말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고 나는 나름대로 바쁜 몸이라 서 다른 기회를 또 내기는 어렵다. 그러니 지금 되도록 많은 이 야기를 해야 해. 쓸데없는 이야기는 피하도록 하자.”

“그러죠, 공작님. 제가 먼저 시작해도 될까요?”

“내가 먼저 시작하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공작님. 저는 공작님이 자신의 용건만 끝낸 다음 저를 쫓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대화를 하고 싶진 않아요. 반면 저는 제 용건만 마치고 마음대로 물러날 수는 없겠 지요. 그러니 친절을 베푸시면 안 될까요?”

락토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말해 봐.”

“감사합니다, 각하. 일전에 각하께선 타이모를 이해하고 싶었 다면 각하를 찾아왔으면 됐을 거라고 말씀하셨죠. 이제 묻겠어 요. 각하께선 타이모의 철학을 제게 설명할 수 있으신가요?”

“처음부터 꽤 시간이 걸릴 주제를 선택하는구나.”

“제겐 꽤 중요합니다.”

“좋아.”

락토는 의자를 뒤로 끌어당기고 두 발을 책상에 얹었다.

“너도 원하면 이렇게 해도 돼.”

“그러기엔 책상이 높고 제 다리는 짧아요.”

“알았어. 그럼 먼저 너와 데라시가 모두 동의한 사실을 말하도 록 하자. 데라시는 그것을 염수 얻기에 비교했고 너는 요리상에 비교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모두 분리되었던 것이 다시 합쳐지 는 것에는 동의한 것이지. 타이모의 분리주의는 통합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그 명칭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통합만 큼이나 분리도 중요하기 때문에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지. 그래. 타이모가 주시한 것은 느닷없이 나타난 이 거대한 단일 세계다. 아라짓 제국. 아라짓 제국은 점진적으로 형성된 사회가 아니다. 제2차 대확장 전쟁 당시 북부의 지배 구조가 상당수 파괴되었고 천일 전쟁을 겪으며 원시제는 남아 있는 지배 구조의 자취들을 전부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배 구조가 아예 없어 진 곳에는 자신의 것을 집어넣었고. 그것은 원시제가 가지게 된 하늘누리와 남부에서부터 온 뱀단지의 강력한 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생길 거라는 예상도 할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단일 세계가 갑자기 태어난 것이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이것 은 갑자기 생긴 일이다. 아직까지도 세계가 이렇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존해 있다. 타이모는 바로 그 지점에서 레콘들이 갑자기 맞이한 위험을 감지했다.”

락토는 잠시 말을 끊었다. 아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으로 그의 말을 재촉했다.

“레콘의 놀라운 힘과 속도 때문에 레콘의 세계는 다른 종족들 의 세계보다 좁다. 이것은 레콘들이 유사 이래 한번도 정치 구조 비슷한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는데도 다른 종족들과 잘 어울려 살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다. 정치 구조는 어쨌든 그 범위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레콘은 쉽게 그것을 넘나들 수 있었다. 발케네를 예로 든다면 발케네 안에 있는 사람에겐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있지. 발케네 밖으로 나가 버린 사람에겐 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레콘들이 그러했지. 그런데 이제 갑자기 레콘들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영향력이 생긴 것이다. 시련까지 가지 않 고서는 레콘은 언제나 아라짓 제국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벗어 날 수가 없지.”

“맞아요. 그렇죠.”

“벗어날 수 없는 것에는 순응해야 하지. 태양의 움직임이나 계 절의 변화 같은 것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레콘도 이제 정치 구조를 익혀야 한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정치 구조의 경험 이 있던 인간이나 나가, 도깨비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 거대 체제 에도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지만 그런 경험이 아예 없었던 레콘 에겐 그럴 능력을 기를 시간이 없었다. 타이모가 경계한 것은 비 레콘들이 만들었기에 비레콘들에게 어울리는 구조에 레콘들이 억 지로 편입되는 것이지. 그것은 도덕적으로도 공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문제의 소지가 있다. 레콘에게 맞지 않는 인간이나 나가의 옷을 입히면 옷이 찢어질 테지. 아니면 레콘이 화를 내거나.”

‘혹은 가짜 레콘이 태어나거나.’ 아실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락토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레콘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진 종족 이 다른 종족과 불화를 일으킨다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큰 상처 를 입을 테지. 그래서 타이모는 레콘들이 먼저 아라짓 제국에서 분리되는 것을 제안했다. 인간이나 나가, 도깨비들이 오래전부터 해 왔던 일을 레콘들도 해 볼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거지. 바로 자신들의 고유한 정치 구조를 만드는 일. 그렇게 레콘들이 자신 들의 정치 구조를 만들어 내면 그 다음에 다른 종족들의 뒤를 이 어 마지막으로 레콘이 제국에 통합되는 거야. 이 통합이 이루어 질 때는 물론 약간의 상호 조종이 필요하겠지만 엄청난 혼란과 폭력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는 훨씬 상식적인 일이지. 이상이 타이모가 제안한 바이다. 맞나?”

“그래요.”

“아냐.”

“예?”

아실은 어리둥절했다. 락토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라고 했어. 타이모는 그렇게 제안한 적 없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죠? 타이모가 그렇게 제안한 적이 없 다니.”

“말 그대로야. 타이모에 관한 어떤 기록에서도 그런 제안은 찾 을 수 없어. 너는 네가 타이모의 곁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나도 많은 현장 증인을 만나봤어. 너도 스카리 요새에서 봤겠지만 거기에는 쥐딤에 있었던 레콘도 많아.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 봤지. 그래서 확신하는 거야. 타이모는 그런 식의 주장을 한 적이 없어. 만약 네가 타이모에게서 직접 그런 계획을 들었다 면 내게 말해 봐. 언제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아실은 발끈하여 입을 열었다. 그러나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실은 의혹에 찬 눈으로 락토를 바라보다가 그 눈길을 스스로에 게 보냈다. ‘언제 어디서? 아실은 생각했다. 그녀는 기억을 더 듬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 꼈다. ‘언제 어디서? 락토가 말했다.

“떠오르지 않을걸. 그런 적이 없으니까.”

“그런 적이 없다면………… 그 계획을 타이모가 말한 적이 없다면 각하는 어떻게 알고 있죠? 그런 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각하 가 알고 있다면 말이 안 되잖아요!”

“내가 그 계획을 알게 된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방법 을 통해서야. 쥐딤 선언문 같은 네가 남긴 글과 네가 한 말들을 통해 알게 되었지.”

아실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발케네의 공작을 바라보았다. 락토는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발을 하나씩 내리며 말했다.

“그러니 너는 많은 학자들을 만나야 했어. 그 학자들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줄 수 없었고, 넌 대단해. 천재적이야. 지난 6년 동안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새에 타이모를 분리주의의 사조 로 만들어 버렸지. 세상을 속여 넘긴 것이지. 하지만 나는 속이 지 못했어. 그것은 타이모의 분리주의가 아니야.”

락토는 짐짓 안쓰럽다는 눈으로 아실의 벌겋게 부푼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은 아실의 분리주의야.”

아실은 갑자기 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다. 아직 벌이 날아다닐 때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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